
1. 시대의 배경, 거리로 나서야 했던 이유
1987년 대한민국은 독재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국가 폭력이 드러났고, 전두환 정권은 헌법을 고쳐 권력을 연장하려 했다.
국민은 직선제 개헌과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고,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전국적인 6월 민주항쟁으로 확산되었다.
이한열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2. 평범했던 청년, 이한열
이한열은 1966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의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보다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과 부조리에 대한 반감에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운동권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시위에 참여하면서 운명은 바뀌게 된다.
3. 최루탄에 맞은 청년, 대한민국을 울리다
6월 9일 오후, 연세대 앞에서 열린 박종철 추모 및 민주헌법 쟁취 시위 중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사를 감행했다.
그 순간, 최루탄이 이한열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는 쓰러졌고, 뇌사 상태에 빠진 채 두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7월 5일, 끝내 그는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실려가는 장면은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4. 이한열이 남긴 유산 — 민주주의의 촉매
이한열 열사의 부상은 6월 항쟁의 격화를 불러왔다.
그가 병상에 있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한열의 죽음은 국민이 권리를 얻기까지 치른 대가의 상징이었다.
그는 단지 시위 중 쓰러진 한 학생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피 묻은 초석이 되었다.
5. 오늘날 이한열을 기억하는 방식
이한열의 시신은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고,
그가 쓰러진 자리는 지금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 기념비로 남아 있다.
또한, 유가족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이한열기념관에서는
그의 유품, 사진, 당시의 시위 기록 등을 통해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왜 행동해야 했는지를 되새기고 있다.
그의 헌신은 이제 민주주의 교육, 청소년 인권교육,
그리고 기억을 통한 저항의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마무리하며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자유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 자유는 어떤 이의 고통 위에 세워졌고,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한열이다.
그는 말 대신 행동했고,
살아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묻고 있다.
“왜 쓰러져야만 바뀌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