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시작과 은폐. 그리고 분노

by 역사다운04 2025. 6. 11.
반응형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 사건의 시작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재학생이던 박종철 군이 경찰의 조사 도중 사망했다.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친구의 소재를 추궁하기 위해 경찰에 불법 연행되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정부는 즉각적으로 사건을 축소하려 시도했다.
공식 발표문에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표현이 포함되었고, 이는 당시 국민들에게 강한 불신과 조롱을 불러일으켰다.


2. 조사 과정과 은폐 시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처음엔 단순 변사 사건으로 처리되려 했다.
그러나 서울대 총학생회와 진보적 언론, 종교계가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내부 고발자와의 접촉을 통해, 경찰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서울대병원의 부검 소견에서도 명백한 질식사 흔적이 발견되면서,
‘고문치사’라는 실체가 점차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쳤을 뿐이며, 자백을 받기 위한 물고문은 없었다"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경찰은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심각한 고문 행위를 저질렀으며, 그 과정에서 박종철은 사망한 것이다.


 3. 국민 분노와 민주항쟁의 서막

이 사건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큰 파장은 정부의 조직적 은폐 시도에 있었다.
언론은 박종철의 사망을 연일 보도했고,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로 이어지는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 즉 6월 민주항쟁의 불씨는 바로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박종철 사건은 단지 한 명의 대학생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어떻게 침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4. 그 후의 진실과 재판

당시 책임자들은 극히 일부만 처벌되었으며, 대부분은 조직적으로 보호되었다.
직접 고문을 가한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대공수사국장 등은 재판에 넘겨졌으나,
실형은 대부분 짧았고, 이후 정치·경제계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국민에게 다시 한 번 ‘법 앞의 평등’에 대한 회의감을 심어주었으며,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5. 오늘날의 의미

박종철 열사는 서울 모란공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남았다.
해마다 1월이 되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가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국가폭력의 반성과 기억’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 마무리하며

박종철은 더 이상 한 명의 대학생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진 ‘시민의 상징’이며,
그가 남긴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권력 앞에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말할 것인가.”

반응형